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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이야기

macodo 2021. 10. 13. 19:01

1963년,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이재명 본인이 직접 공개한 초등학교 1학년 성적표에 따르면 고집이 세고 성적은 ‘미미’했지만 동무들과 잘 놀며 씩씩했다고 한다.

또한 학교가 집에서 5km 정도 되는 거리에 떨어져 있어 비 많이 오면 징검다리 넘친다고, 눈 많이 오면 미끄럽다고, 덥다고, 춥다고 땡땡이치느라 학교에 잘 못 갔다고 한다.

5학년 때 남들이 다 가는 수학여행에 돈이 없어 못 가겠다고 하자, 선생님이 찾아와 몇 시간이나 설득해 데리고 갔다. 당시 교장 선생님이 배려한 덕분이었다.

유년 시절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했던 낚시는, 현재 이재명의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됐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도화지나 크레파스를 손에 쥔 적이 없어, 친구들이 사생대회를 하러 밖에 나가면, 대신 화장실 청소를 했다. 학교에서 여름이면 보리 한 되, 겨울이면 나락 한 되를 가져오라고 했지만, 어머니 고생을 알았던 소년 이재명은 대신 혼나는 것으로 때웠다고 한다.

1977년 2월,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성남시로 이주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다른 빈민가구의 아이들처럼 소년 이재명도 중학교 대신 가내수공업 목걸이 공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회사에 문제가 생겨 몇 천 원 정도의 월급을 떼이고 난 뒤, 사업자등록이 되어 있는 '동마고무'라는 곳으로 옮겼다. 법적으로 노동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어서, 여러 가명으로 공장을 전전하기도 했다. 동마고무에서 손가락을 다치는 첫 산업 재해를 당했다.

소년공 이재명은 동마고무를 나와 다음 직장인 '대양 실업'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프레스에 손목이 눌려 관절이 으스러지는 두 번째 산업 재해를 당했다. 당시 공장은 사고가 빈번해서 주변 사람들은 다들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다독였다.

그 말에 병원도 찾지 않고 아픈 팔로 계속 일을 했다. 하지만 열 여섯살 무렵 키가 15cm 자라면서, 손목과 팔의 뼈도 자라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부러진 뼈가 다른 뼈의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팔이 비틀어졌고, 관절이 으스러진 부분의 성장판이 깨지고 만 것이다. 결국 이후 장애인 6급 판정을 받아 병역 면제 판정을 받게 되었다.

대양실업에 다니던 중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여자아이들 무리와 마주친 이후 '공부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이 과정에서 검정고시 학원 선생님의 배려를 받았다. 이재명이 돈이 없어 더 이상 학원에 나오지 못한다고 말하자 선생님이 무료로 단과반을 듣게 해준 것이다. 이후 1978년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중졸 자격을 얻었다.

대양실업에서 당한 산업 재해로, 팔의 통증은 계속 심해졌다. 더불어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동네 친구들을 볼 때마다 부모님에 대한 반항심도 생겼다.


방황 끝에 1980년 2번의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음을 다잡았고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후 1980년 4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고졸 자격을 얻었다.

1981년부터 학력고사 성적만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바뀌게 된다. 대학생 과외도 전면 금지되는 대신 장학생 제도가 확대됐다.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시험만 잘 보면 장학금을 받고 다닐 기회가 열린 것이다.

1981년 7월 공장까지 그만두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결국 학비 지원에 생활비 20만원을 받는 중앙대학교 법학과 82학번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86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사법연수원에 입학했다. 사법연수원 재학 당시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을 들었다.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을 듣기 전에는 연수원 수료 이후 전관예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판사와 또는 검사를 선택하려고 하였으나 노무현의 말에 감명을 받아 인권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